편찮으신 친정아버지 곁에서 젤다의 병세가 호전되기를 바랬던 스콧은 몽고메리로 이사를 했다. 그 기간 동안 소설 <밤은 부드러워>를 집필했고, 젤다는 그녀의 유일한 소설인 <왈츠를 구해줘>를 쓰기 시작했다. 모든 곳에는 그 나름의 시간이 있다.
그래서 몽고메리의 제퍼슨 빌에는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다른 곳에는 없는 시간과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초여름 밤 여섯 시 30분쯤, 모퉁이 가로등이 깜빡거리며 켜지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커다란 백열등이 나방과 딱정벌레로 검게 변하고 아이들이 먼지투성이 거리에서 잠자리에 들도록 불려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 젤다 <남부 소녀> 중
스콧과 젤다는 몽고메리에서 불나방처럼 사랑에 빠져 뉴올리언스, 뉴욕, 파리를 넘나들며 역사상 가장 화려한 1920년대 정점을 살다 갔다. 그들은 광란의 1920년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주인공이었다. 호텔 분수대에 뛰어들고, 매일 밤 호화로운 파티를 열며 시대를 소비했다. 스콧이 백 달러짜리 지폐를 말아 담배를 피운 일로 그 정점을 찍었다.
2007년 공쿠르 상을 받은 질 르루아의 소설 <앨라배마 송>은 스콧의 죽음 이후 하일랜드 정신 병원에 있던 젤다가 회상하는 스콧과의 사랑과 파탄 그리고 회한의 이야기이다.
“글쎄요.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세상에 자신을 내보이고 싶어했어요. 그가 성공했듯이 자신도 성공하기를 바랬어요. 욕망이 당신을 고갈시킨 겁니다. 성공에 대한 집착이. 당신은 결혼했던 게 아닙니다. 부인, 당신은 광고계약서에 서명을 했던 거예요.” <앨라배마 송> 중에서
이들은 베컴과 빅토리아 부부 이전에 스캔들로 돈을 버는 최초의 부부였다. 소설 제목은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 부른 노래에서 가져왔다.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가사는 우리는 끝없이 ‘위스키 바’와 ‘소녀’를 찾지만, 우리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반복되는 후렴구가 나온다.
이 노래는 삶의 끝없는 허무감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투영하며, 도어스의 1집에 수록되었다. 데이빗 보위는 베를린에 살며 아침마다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고 말한다.
“우리 둘 다 매우 화려하고 생생한 그림 같아요. 세부 사항은 생략된 그런 그림처럼요.” 젤다는 스콧에게 이렇게 썼다. “하지만 우리의 색깔이 잘 어우러질 것이고, 인생이라는 갤러리에 나란히 걸려 있으면 아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는 스콧 피츠제럴드가 1922년에 발표한 짧은 단편소설을, 데이빗 핀처 감독이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재탄생 시킨 명작이다.
노인의 몸으로 태어난 벤자민이 버려지고, 평생의 고향이자 안식처가 되어준 양로원 ‘놀란 하우스(Nolan House)’는 뉴올리언스의 가장 아름다운 역사 지구인 가든 디스트릭스에 위치해 있다.
1832년에 지어진 유서 깊은 조지아풍 대저택은 넓은 흰색 베란다와 고풍스러운 기둥, 그리고 마당을 둘러싼 거대한 오크 나무들이 뉴올리언스 특유의 낭만적이고도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화 촬영 당시 내부와 외부 모두 활용했으며 현재도 많은 영화 팬들이 찾는 명소이다. 정문 앞에는 커다란 받침대가 놓여 있어 포토존을 만들어 놓았다.
원래 1849년 투자자 안나 파월 클라크를 위해 지어진 이 코티지는, 1851년 설탕 상인 로건 맥라이트에게 넘어갔다는 부분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미시시피는 면화, 설탕, 노예의 수송로였다.
캐나다 출신 건축가 윌리엄 T. 놀란은 결혼하여 저택을 재건축하였고, 1909년에 완공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2008년 파라마운트의 영화 촬영 장소로 사용될 때까지 이 저택에 거주했다.
영화는 80 세의 외모를 가진 아기로 태어난 벤자민 버튼과 평범하게 나이 들어가는 여인 데이지의 평생에 걸친 사랑과 삶을 다룬다.
제1 차 세계대전이 끝난 밤, 뉴올리언스에서 끔찍한 노인의 외모를 가진 아기가 태어난다. 친부는 충격을 받고 아기를 양로원 계단에 버리지만, 마음씨 따뜻한 퀴니가 아기에게 ‘벤자민’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친자식처럼 키운다.
벤자민은 노인들과 함께 자라지만, 남들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젊어지며 세포가 재생된다. 그 과정에서 풋풋한 소녀 데이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벤자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데이지의 시간은 똑바로 흐르기에, 두 사람의 외모와 나이가 비로소 완벽하게 일치하는 ‘인생의 한 시점인 30대’가 찾아온다. 두 사람은 뉴올리언스의 집에서 가장 뜨겁고 행복한 사랑을 나눈다.

이 영화는 독특한 로맨스를 넘어, 우리에게 ‘시간과 상실’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벤자민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관객에게 가장 위대한 위로를 건넨다.
“인생을 사는 데 있어 너무 늦거나, 혹은 너무 이른 건 없다.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어. 꿈을 이루는 데 시간 제한은 없단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든 똑바로 흐르든,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아가는가’ 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유연한 태도도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벤자민이 자란 곳은 역설적이게도 늘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하는 ‘양로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만남 뒤에는 늘 헤어짐이 있고, 붙잡고 싶어도 결국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 인생의 순리임을 배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되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함이란다” 결국 시간이 순방향이든 역방향이든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것을 잃어가기에 곁에 있는 순간을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태어날 땐 노인이었던 벤자민도, 아기로 태어난 데이지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연약한 갓난아기로 돌아간다. 시간의 방향은 달랐지만 두 사람의 종착지는 같다. 삶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인생은 결국 소멸을 향해 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을 함께 걸어줄 ‘누군가’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임을 보여준다.
스콧과 젤다는 영원할 것 같았던 1920년대에 화려함 속에 갇혀 파멸해 갔지만, 스콧이 남긴 이야기 속 벤자민은 거꾸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붙잡았다.
영원한 것은 없기에 ‘오직 오늘 뜨겁게 사랑하라’던 젤다의 말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던 벤자민의 고백이 뉴올리언스의 고풍스러운 테라스 위로 겹쳐 흘렀다. 놀란 하우스는 죽은 이들의 안식처인 라파예트 공동묘지 근처에 있어 더욱 의미가 각별했다.
20대 초반에 읽고 영화로만 접하던 <위대한 개츠비>를 2025년 번역본으로, 젤다의 <왈츠는 나와 함께>도 읽었다. 그리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를 네 번째 보게 되었지만, 화려함과 허무함이 교차하는 이 영화는 볼 때마다 눈물샘을 건드린다.
브레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의 젊고 아름다운 시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간과 소멸에 대한 바니타스(Vanitas, 공허)이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 영등포문화원, 도서관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