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년 전이었나, 외국에 여행을 갔다가 한 동네를 들렀어요. 잠깐 쉬었다 가려고 했죠. 그런데 너무 희한한 거예요. 사람 하나 안 지나다니고 집마다 토템을 세워뒀고요. 돌아다니는데 무섭더라고요. 대낮인데도 그러니까. 그날 제가 수첩에 20~30장 정도 메모를 하고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요.”
올해 최고 화제작 ‘호프’의 출발점은 오래전 한 여행지에서의 경험이었다. 나홍진 감독은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이같이 밝히며 “그게 영화의 시작이었다”고 돌아봤다.
나 감독의 영감은 2018년이 돼서야 초고의 형태를 갖췄다. 그리고도 8년이 지나서야 ‘호프’라는 이름으로 관객과 만나게 됐다. 나 감독에게는 10년 만의 신작이다.
“이 정도면 초고가 나온 것 같다고 했을 때가 2018년도였어요. 그다음에는 준비를 해야 했죠. 공정이 되게 많았어요. 준비할 것도 너무 많았고 공부할 것도 너무 많았어요. 제일 중요한 건 ‘어떻게 메이킹할 것인가’였죠. 고려할 요소가 너무 많아서 준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촬영은 팬데믹이 끝나자마자 바로 들어갔어요.”
크리처 디자인에만 무려 3년을 쏟았다. 나 감독은 “나를 더럽게 고생시켰지만 너희(외계인)들도 징글징글하게 고생했다”며 애증 섞인 한마디를 던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타블로이드지에서 봤을 법한 전통적인 외계인을 등장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국내에 그런 디자인을 할 수 있는 분들이 계신 줄 아예 몰라서 외국인분들과 작업을 했거든요. 할리우드에서 큰 작품을 하신 회사인데 지금 어떤 영화에서는 어떻게 나오고 흐름이 어떻고, 설명들을 해주셔서 당초 생각했던 부분을 지킬지 바꿀지 고민하게 됐어요. 또 1개의 캐릭터를 위해 100개의 캐릭터를 만드는데 사용되지 못한 99개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걸 저한테 들이미는 사람들도 있었고,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제안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 진화시켜 나갔어요.”
개봉 전부터 평가가 엇갈렸던 외계인 CG(컴퓨터그래픽)의 완성도에 대한 항변도 덧붙였다.
“대낮에 역동적으로 움직이면 모션 블러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배우들이 뛰는 장면도 보면 얼굴이 잘 안 보이잖아요. 크리처가 달리면 표현하기가 쉽지 않아요. 블러가 들어가면 디자인이 명확하게 들어간 컷이 몇 개 없어지는 거예요.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요. 어느 감독이 모든 게 마음에 들겠어요. 다만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이처럼 제작에 오랜 시간을 투입한 만큼 러닝타임도 상당하다. 156분, 장장 2시간 36분이다. 짧은 분량의 콘텐츠 소비가 늘어나는 추세 속 과감한 선택이다.
“(길어서) 관객들이 보기 힘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만든 거죠.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 되지 않게끔 최선을 다했어요. 그렇다고 찍어놓은 영화에 손상이 가는 건 원하지 않았어요. 더 잘해서 더 편안하게 몰입하실 수 있도록 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타협하지 않는 연출자’라는 인식을 굳히는 대목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타협 없는 현장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얼마나 시뮬레이션을 많이 하고 다양한 대안을 만들어 놨는지, 그 대안을 얼마나 많이 준비해 놨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순발력 있게 상황에 맞춰 가야죠. 저는 안 된다는데 막 가려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숲을 찍는데 시나리오상 몇 컷 남지 않았을 때였어요. 촬영감독님이 그만하자고 충분하다고 해서 정리한 적이 있어요. 저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진심으로 신뢰해요. 오래됐잖아요. 저한테 조언해 주시면 웬만하면 다 들어요. 터무니없는 말씀을 안 하시니까.”
‘호프’는 개봉 1일 차 15일에만 관객 33만3911명을 불러 모았다. 나홍진 감독의 전작 ‘추격자’(11만3673명), ‘황해’(12만482명), ‘곡성’(31만42명)을 압도하는 오프닝 스코어다. 무엇보다 올해 가장 좋은 성적으로 스타트를 끊은 ‘군체’(19만9762명)보다 13만명을 앞섰고, 천만영화 ‘파묘’(33만118명)도 뛰어넘는 기록이다. 호불호와 별개로 화제성과 흥행세는 단연 최고다.
“부담은 당연히 있죠. 저는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고 객석에 앉아 계신 한 분 한 분을 진짜 어렵게 생각해요. 제가 관객으로서 영화 상영을 기다릴 때 필름 메이커가 누구인지가 제 태도에 큰 영향을 주더라고요. 관객들이 제 영화를 그렇게 봐주시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어요. 저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야기를 쓸 때부터 그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요. 제일 많이 긴장되는 순간이지만 제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죠.”
심언경 기자 notglasses@kuk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