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종의 두 손은 꽃과 술병, 오렌지로 가득한 카운터에 올려져 있고, 얼굴은 피곤에 달아올라 붉게 물들어 있다. 손님들은 그녀를 지나쳐 공연을 바라보지만, 그녀는 그저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 관객이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카운터 위 오렌지 접시는 장식이 아니다. 마네는 오렌지를 매춘과 연결시키곤 했다. 그래서 쉬종은 술을 파는 동시에 사랑을 파는 존재로 암시된다. 그녀는 판매원인 동시에 상품, 즉 “마실 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이 된다.
쉬종은 마치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처럼, 모든 중요한 요소들이 하나의 선을 따라 정렬되어 있다. 콧날은 똑바로 서 있고, 목에 걸린 펜던트는 그 선을 이어 내려온다. 가슴에 놓인 부케와 단정하게 줄지어 있는 자개 단추들도 그 선을 따라가고, 결국 상의 V자 사이로 드러나는 치마의 주름까지 같은 길을 걷는다.
이렇게 모든 것이 중앙선에 모여 있으니, 보는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선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된다. 마네는 ‘중심’이라는 무대 장치를 만들어 그녀를 화면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마치 관객이 무대 한가운데 서 있는 배우를 바라보듯, 그림 속 인물은 시선의 중심에 서게 된다.
결국 마네의 선택은 미적 균형을 넘어서, 인물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는 그녀를 놓칠 수 없게 된다.
위스망스는 이곳을 “분칠한 여인네들의 냄새뿐 아니라 퇴폐적인 대화까지도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는 곳”이라 했고, 모파상은 소설 벨아미에서 “술과 사랑의 상인”이라 불린 여인들을 묘사했다.
그림 속 세부 묘사도 흥미롭다. 왼쪽 위에는 녹색 신발을 신은 공중그네 곡예사의 발이 있고, 오른쪽에는 붉은 삼각형 라벨이 붙은 영국 맥주가 놓여 있다. 이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반독일 정서를 은근히 드러내는 장치였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바>의 정확한 모델은 앵그르의 <오송빌 백작부인>이다.
서양 회화에서 거울은 흔히 인물의 뒤편에 배치되어, 단순히 공간을 확장하거나 인물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장치로 쓰였다. 이때 거울 속 상은 광학적으로 자연스럽고, 배경의 일부로 큰 긴장감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마네의 경우는 달랐다. 그의 그림에서 거울은 배경이 아니라, 시선과 공간을 교란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즉, 거울 속 반영이 실제 공간과 불일치하거나, 보는 이의 기대를 무너뜨리며 회화적 장치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마네는 앵그르의 초상화처럼 거울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거울을 화면 전체로 확장해버렸다. 그 결과, 관객은 그림 속 현실과 반영 사이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허상인가?”
하지만 이곳을 바라본 시선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평론가 월터 페이터(Walter Pater, 1839~1894)는 마네의 그림을 두고 “거울은 단순히 반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비틀어 보여주는 장치”라며, 관객이 그림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고 평했다. 실제로 그림 속 웨이트리스는 정면에서 관객을 바라보지만, 거울 속에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다른 신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현실과 반영이 어긋나는 순간, 보는 이는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더 큰 수수께끼는 거울 속의 쉬종이다. 거울이라면 정면에 선 그녀의 모습이 그대로 비쳐야 하는데, 그림 속에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비스듬하게 나타나며, 그녀 앞에 서 있는 신사까지 함께 비친다. 광학적으로 불가능한 반영으로 마네는 이를 의도적으로 그려 넣어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처음엔 여인과 그녀 뒤의 거울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곧 이상한 기분이 든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상식적으로 우리가 그림의 왼쪽에 서 있어야만 그런 반사가 가능하다. 그런데 거울의 테두리는 카운터와 정확히 평행한다. 거울은 똑바로 서 있는데 반사는 비스듬히 나타난다.
이 상황을 풀어내려면 화가가 두 자리에 동시에 서 있었거나, 왔다 갔다 하며 두 시점을 합쳐 그려야 한다. 관객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는 정면에 서 있으면서 동시에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야 하는 모순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더 기묘한 점은 여인과 대화하는 남자의 모습이다. 거울 속에는 남자가 분명히 서 있는데, 정작 여인 앞에는 아무도 없다. 만약 그가 실제로 그녀 앞에 있었다면, 여인의 얼굴이나 목, 카운터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텐데, 빛은 아무런 방해 없이 그녀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결국 이 그림은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시각적 퍼즐이다. 마네는 거울과 인물, 빛과 공간을 교묘하게 배치해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는 감상자가 아니라, 그 퍼즐 속에 끌려 들어간 참여자가 되어버린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바>는 관객을 시험하는 장치가 가득한 무대이다. 그림 속 여인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거울 속에는 그녀와 대화하는 남자가 비친다. 그런데 우리가 그 남자의 자리에 서 보려고 하면, 그림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된다. 마치 “너는 이 장면 속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당시 사람들도 이 이상한 구도를 눈치챘다. 풍자화가 스톱은 그림을 패러디하면서 “마네의 그림을 제대로 고쳤다”는 설명을 붙였다. 그만큼 이 작품은 보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학자들이 ‘숨겨진 얼굴’이나 ‘자연스러움의 전복’ 같은 제목으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결국 이 그림은 술집 풍경을 빌려서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관계를 뒤흔드는 실험이다. 그래서 관객은 그림 속에서 자기 위치를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정면의 여인을 그리려면 화가는 그녀의 눈높이쯤에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거울 속 남자의 시선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화가가 동시에 두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관객은 혼란을 느낀다.
· 화가는 여기에도 있어야 하고, 저기에도 있어야 한다.
· 누군가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없어야 한다.
· 내려다보는 시선과 올려다보는 시선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렇게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시선들이 겹쳐지면서 관객은 안정된 위치를 찾을 수 없고, 그 불안정함이 오히려 매혹으로 다가온다.
관객은 그림을 보면서 마치 두 장의 사진이 겹쳐진 듯한 장면을 상상한다.
· 정면에는 고고하고 깨끗한 젊은 여인이 있고,
· 거울 속에는 욕망을 받아들이는 듯 순종적인 여인이 있다.
관객은 거울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지금 이 순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 시선의 흐름을 따라 정신적으로 자리를 옮겨 다니게 된다. <계속>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 영등포문화원, 도서관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