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국한될까봐 걱정돼요. 제가 만든 영화는 언제나 대중을 위한 상업영화거든요. 재밌어서 칸영화제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어요. (제 영화가) 예술영화란 선입견은 버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난 5월 제75회 칸영화제에서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수상하고 입국한 박찬욱 감독이 인천국제공항에서 한 말이다. 칸영화제 트로피를 받은 기쁨을 누려도 될 시점에 한국 관객을 의식하며 우려를 드러낸 점이 눈에 띄었다. 지난달 ‘헤어질 결심’ 제작발표회에서도 비슷했다. 박 감독은 “칸영화제 세 번째 수상보다 한국 관객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가 제일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며 국내 관객을 생각했다. ‘헤어질 결심’이 세계적인 영화제 수상을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란 것, 철저히 관객들을 위해 만든 영화라는 걸 확실히 했다.
‘헤어질 결심’이 개봉하기 이틀 전인 지난달 27일 화상으로 만난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기획하기 시작한 시점에 함께 각본을 쓴 정서경 작가와 나눈 대화를 들려줬다. 정서경 작가가 “우린 상업영화를 못 만든다. 못 만드는 종족”이라고 단언하자, 박찬욱 감독은 ‘보란 듯이 상업영화를 만들어서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 읽고 있던 스웨덴 추리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 등장하는 형사 캐릭터와 가수 정훈희의 ‘안개’를 모티브로 수사극 형식을 빌린 로맨스 영화를 만들려는 생각을 했다. 대본을 쓰기 전부터 배우 박해일과 탕웨이를 먼저 캐스팅하기도 했다. 어떤 생각으로 ‘헤어질 결심’을 만들었는지부터 탕웨이 캐스팅과 흥행에 대한 욕심까지 박찬욱 감독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헤어질 결심’을 만들 결심
- 어떤 영화를 만들려고 하신 건지 궁금해요. 감독님의 이전 작품과 달리, ‘헤어질 결심’은 절제된 감정 표현이 눈에 띄거든요. 이 같은 방식을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헤어질 결심’은 대사가 적은 건 아니지만, 감정표현은 적은 편이에요. 요즘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 시대잖아요. 제 나이대나 동양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시대죠. 그래도 전 이런 얘기가 젊은 사람들에게도 통하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서는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영화에선 감정을 내면에 갖고 있기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요. 속으로만 간직하는 감정을 얼마나 교묘하게, 얼마나 애타게 보여주는지가 중요했어요. 영화 속 등장인물이 감춰도 우리가 볼 땐 더 빤히 들여다보일 때도 있고, 그게 더 재밌을 수 있잖아요. 그런 영화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 코미디에 욕심이 많다고 하셨는데, 박찬욱 감독님의 코미디는 무엇인가요.
“제가 코미디 장르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코미디는 예상치 못한 코미디거든요. 기껏해야 만들 수 있는 건 공포영화인데 뜻밖에 가끔 웃긴다, 스릴러인데 가끔 웃긴다 정도예요. 다른 장르인데 때때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웃기는 코미디인 거죠. 전 그래야 재밌고, 그런 코미디가 우리 인생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상황에서 당사자는 절박해도 남이 볼 떈 우스꽝스럽거나, 살려고 몸부림치는 행동인데 웃기게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 슬퍼요. 슬픔을 동반하는 코미디라서 좋아해요.”
- 오랜만에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를 만드셨서요. 다음에도 이렇게 자극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드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이번 영화에 대한 만족도도 궁금합니다.
“제가 만들어둔 각본이나 기획 중에 아주 폭력적인 것도 있고, ‘헤어질 결심’보다 폭력이 적은 영화도 있어요. 이 길로 진로를 바꿔 탔다는 건 아니에요. 그때그때 스토리가 요구하는 표현 수위를 맞춰갈 뿐이죠.
‘헤어질 결심’에 대한 만족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에요. 박해일과 탕웨이, 두 배우의 연기가 귀여워서 제가 만든 영화지만 다시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크게 거슬리는 장면이나 후회하는 장면이 적은 영화라고 볼 수 있어요.“
박찬욱 감독에게 탕웨이란
- 각본을 쓰기 전부터 캐스팅할 정도로 배우 탕웨이와 함께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컸나요. 탕웨이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영화 ‘색, 계’(감독 이안)를 보자마자부터였어요. 영화 ‘만추’(감독 김태용)와 ‘황금시대’(감독 허안화)를 보고 점점 더 이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탕웨이의 매력은 몸이 꼿꼿하다고 해야 할까요. 극 중에도 나오지만 정말 탕웨이를 생각하면서 쓴 대사예요. 박해일에게도 해당하는 대사고요. 저 사람이 왜 좋냐고 말할 때, 그게 결국 자신이 되고 싶은 것에 대한 얘기일 때가 있잖아요. 대사 쓸 때 두 사람 모두 해당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 탕웨이가 연기한 송서래 역할은 처음부터 외국인이란 설정이었나요. 탕웨이가 캐스팅되면서 서래 캐릭터에 영향을 미친 것이 있을까요.
“탕웨이를 캐스팅하려고 외국인 설정을 만든 거니까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죠. 정서경 작가와 다짐했어요. 우리가 비록 탕웨이를 캐스팅하려고 중국인으로 설정했지만, 관객 입장에선 중국인이라는 점이 중요해서 썼고 그에 맞는 배우를 찾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써야 한다고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래가 외국인이란 점을 파고 들어서 외국인 설정이 캐릭터에 아주 중요한 일부로 녹아들도록 했습니다.”
- 탕웨이가 외국인이라 한국어 대사를 할 때 전달력이 떨어질 수 있잖아요. 탕웨이가 한국어 대사를 할 때 자막을 넣을지 고민했는지, 일부러 넣지 않은 건지 궁금합니다.
“우리도 많이 노력해요. 영화관 조건에 따라 어떤 상영관에선 잘 들렸다고 하고, 어떤 상영관은 안 들렸다고 해요. 우린 결국 잘 조율된 극장 조건에 맞춰서 만들 수밖에 없어요. 탕웨이의 한국어 대사는 특히 몇 백번을 녹음해서 넣은 거예요. 다른 배우들 대사보다 차라리 더 잘 들리죠. 전 외국인이 하는 한국어라서 선입견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잘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하고 더 긴장해서 악영향을 주기도 하고요. 자막은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어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자막을 넣는 건 탕웨이의 노력 절반 정도를 헛수고로 만드는 일이니까요. 우리 목표는 탕웨이의 대사를 자막 없이 알아듣게 하는 것이었고,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박찬욱 감독을 움직이게 하는 것
- 박찬욱 감독님 영화는 다시 보고 싶다는 평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이런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두 번, 세 번 보면 더 재밌는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거지, 한번 봐서 이해 못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한번 보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걸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요. 다만 집중은 필요하죠. 상영 중간에 화장실에 다녀오고 문자를 주고 받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겠죠. 집중만 하면 이해하고 즐기는 데 문제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기왕 똑같이 대사를 말하고 똑같이 연기하는 거면, 거기에 다른 레이어가 2~3중으로 있으면 볼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하는 재미가 있겠죠.”
- 매번 작품을 만들 때마다 받는 평가와 기대에 대한 부담은 없으신가요. 다양한 극찬과 평가 속에서 정말 기쁘고 감동적인 말은 어떤 게 있으셨나요.
“흥행 부담은 있죠. 늘 그 생각만 해요. 다음 작품을 투자받을 수 있을 정도의 흥행이 돼야 한다고요. 투자한 사람이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흥행을 해야 하니까요. 감독으로서 생존이 달린 문제기 때문에 그런 생각만 해요. 흥행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영화를 만드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 제 능력이 닿는 한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예요. 제가 갑자기 최동훈 감독이나 류승완 감독을 흉내 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흥행을 목표로 일하는 거죠. 여태까지 영화들과 많이 다르다는 얘기가 듣기 좋아요. 발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참 반갑고요. 나이도 있고 30년을 감독으로 일했는데, 아직 발전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정말 즐거운 일이죠.”
- 평소 박찬욱 감독님을 움직이게 하는 자극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저 다르기 위한 다름은 안 되죠. 다르면서도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겠다고 생각해요. 항상 옛날 대가들과 비교를 합니다. 영화 뿐 아니라 다른 예술 매체, 예를 들어 이봉조 작곡가가 도달한 수준이라든가. 진짜 훌륭했던 예술가가 기울인 노력과 성취와 자꾸 비교하면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