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8일 (4)
대전 서구 도마·변동, 반세기 이야기 모두 철거 위기

대전 서구 도마·변동, 반세기 이야기 모두 철거 위기

‘촉진‘이라는 행정 명령으로 소수 의견 무시돼선 안된다
남진 음악 평론가 및 작곡가

승인 2026-06-16 15: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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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 음악 평론가 및 작곡가.
남진 음악 평론가 및 작곡가.
한국전쟁은 국토의 물리적 형태만 파괴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은 장소가 품고 있던 이야기들까지 지워버렸다.
골목마다 켜켜이 쌓여 있던 사람들의 삶의 흔적,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기억의 층위들이 잿더미와 함께 사라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단 하나였다.
무너진 것을 치우고 새것을 세우는 것.
그 절박했던 생존의 방식이 수십 년을 거치며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감각으로 굳어졌다.
새것이 좋은 것이고, 낡은 것은 허물어야 할 것이라는 감각.
부수고 다시 세우는 것이 곧 발전이라는 믿음.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었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우리는 실제로 무언가를 일구었다.

그러나 지금, 그 믿음에 관하여 다시 물어볼 때가 됐다.
오늘의 한국은 다르다.
BTS의 음악이 전 세계 청년들의 언어가 되고,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세계인의 감수성을 움직이며, 한식과 한국어가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K-컬처가 세계를 선도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가진 것들.
우리 고유의 이야기, 정서, 미감.
이처럼 보편적 울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렇다면 도시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진 것을 허물고 새것을 세우는 개발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이야기들을 보존하고 장소에 깃든 시간성을 살려내는 개발이다.

대전시 서구 도마·변동의 대규모 주거환경정비사업 실태를 바라보며 바로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도마동과 변동은 대전 서구의 역사를 이끌어온 가장 뿌리 깊은 원도심이다. 1963년 대전시로 편입되어 오늘의 모습이 있기까지, 40년에서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이야기가 켜켜이 깃든 동네다.
전쟁 이후 허리띠를 졸라매며 도시를 일군 세대의 노고, 그 안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유년, 골목 어귀 가게들의 흥망성쇠, 이웃끼리 담 너머로 나누던 다정한 말들.

이 모든 것이 그 집들의 벽과 골목의 굴곡에 새겨져 있다.
이것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 아니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 속에 살아 숨 쉬는 시간의 층위다.

그런데 현재 이렇듯 소중한 도마·변동의 반세기 이야기는 ‘재정비촉진지구‘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도시재정비사업으로 인하여 통째로 철거될 위기에 놓여 있다.

철거 과정에서 1970~80년대에 형성된 붉은 벽돌 외장의 2층 주택들, 소담한 정원, 좁고 정겨운 골목길로 이루어진 서민 동네의 풍경은 하나도 남김없이 흙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있다.

삶의 현장은 또 어떤가.
대전 서구 전체 면적의 약 5.1%를 차지하며 대략 4만 9천 명(2026년 5월기준)이 거주하는 인구 밀집 지역인 도마·변동의 재개발은 빈 땅이나 허허벌판에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마찰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민간에게만 맡겨져 지지부진했던 재개발이 동력을 얻도록 공공기관이 협력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떠나기를 원치 않는 건물 소유주나 소상공인들을 밀어내는 일에 가속도가 붙도록 관할 구청이 돕는 ‘합법적 역차별‘이 자행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결과 도심 한복판에서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영위하며 이웃과 정을 나누고 살기를 원하는 서민들, 그리고 이곳에서 대를 이어 생계를 유지해 온 소상공인과 상가 소유주들이 마주한 현실은 절박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다수결‘과 ‘개발 이익‘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분담금과 턱없이 부족한 보상금으로 인해 정든 터전에서 쫓겨나야 하는 실질적인 ‘생존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이주 자체가 생존의 위협이 되는 원주민들의 처지와, 이 행정구역이 오랜 시간 쌓아온 고유의 가치들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과 ‘넓은 도로 정비‘라는 획일적인 행정 목적 앞에서 순식간에 청산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는데도 이 씁쓸한 현실을 개탄하는 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계획 도면 위에 그어진 몇 줄의 직선을 위해 수십 년간 얽혀 있던 골목의 곡선과 그 안의 삶들이 통째로 도려내어질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말이다. 그것을 허무는 행위는 단순한 건물 철거가 아니라 이야기의 파기이자,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짓밟는 폭력인데도 말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장 먼저 통절하게 고백했던 주체는 다름 아닌 대전시였다. 과거 대전시는 도시정비기본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며, 구역 단위의 전면 철거 방식이 원주민 재정착률을 10% 미만으로 떨어뜨리고 지역 커뮤니티를 송두리째 파괴한다는 실책을 스스로 공표한 바 있다.

당시 대전시는 ‘떠나는 도심에서 돌아오는 도심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면 철거 대신 주민 맞춤형 소규모 재생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비사업 추진이 원활하지 않거나 주민 갈등이 심한 구역은 과감하게 해제하는 ‘출구전략‘을 모색하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지금 도마·변동에서 과거 대전시가 스스로 ‘원주민을 내쫓는 실패한 방식‘이라 규정했던 그 전면 철거형 개발이 ‘촉진‘이라는 행정 명령 아래 한층 더 물리적인 압력을 가하며 재현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대전시는 이 정비사업의 방향과 속도를 진지하게 재검토해 주어야 마땅하다.
조합이 설립됐다는 행정적 절차가 ‘근본적인 질문’과 ‘소수의 눈물’을 생략할 이유가 될 수 없다.
미분양 사태의 곡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아파트 공급 과잉의 우려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대전시의 도시계획은 오직 재개발로 재산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일부의 열망에 편승하여, 거대한 초고층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외길만을 고집할 것인가.

재개발에 대한 대중심리를 호도하여 밀어붙인 거대한 정비사업의 결과가 만에 하나 장기 미분양 사태로 이어질 때, 그 최대 피해자는 과연 누가 되겠는가.
도시 재생의 진정한 가치는 기존의 것을 허물고 모두를 내쫓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가 품어온 이야기를 지키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과 함께 다음 세대에 그 이야기를 넘겨주는 데 있다.

우리가 전후 반세기 넘게 만들어낸 이야기들과 이웃들의 삶을 우리 손으로 다시 지워버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전시는 지금이라도 도마·변동 재개발 사업의 타당성을 꼼꼼히 따져보고, 정비사업의 ‘촉진‘이 불러일으킬 부정적 파장들을 면밀히 검토해, 시정해 주길 진심으로 촉구한다.
명정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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