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일 업계에 따르면 SK그룹은 최근 정 전 사장을 지주사인 SK㈜ 미래성장 담당 사장과 SK하이닉스 에너지TF 사장으로 동시에 선임했다. 올해 초 SK하이닉스 고문으로 영입한 지 약 5개월 만에 그룹 차원의 에너지 전략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왜 지금 ‘한전’ 출신인가
정 사장은 산업통상부에서 반도체전기과장·에너지산업정책관·에너지자원실장 등을 거쳐 한국가스공사 사장, 산업부 차관, 한국전력 사장을 역임한 에너지 정통 관료다. 전력 정책과 발전 연료, 요금 체계, 송전망, 공기업 운영을 두루 경험했다. 2023년 한전을 떠난 뒤 삼성전기·사우디전력공사 사외이사를 거쳐 올해 1월 SK하이닉스 고문으로 합류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인사의 배경으로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꼽는다. SK하이닉스는 청주 M15X에 20조원 이상을 투자하고 있으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 건설도 본격화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향후 5년 내 전체 웨이퍼 생산능력을 두 배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AI 사업 역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SK텔레콤은 아마존웹서비스(AWS)와 함께 울산에 약 7조원을 투입해 103MW 규모 AI 데이터센터를 구축 중이며, 장기적으로는 1GW 이상 규모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SKT는 2030년까지 그룹 전체 AI 데이터센터 용량을 300MW 이상으로 늘리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문제는 전력이다. 첨단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지만 공급 인프라 확충 속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일대에 2053년까지 10GW 이상의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모두 가동될 경우 총 전력 수요가 약 15GW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원전 15기 수준이다.
실제 정부와 한전이 협의한 전력 확보 규모는 삼성전자 6GW, SK하이닉스 3GW 수준으로, 클러스터 전체 필요 전력인 15GW의 60%에 불과하다. SK하이닉스 일반산단이 필요로 하는 6GW 중 3GW가 여전히 부족하다. 계획된 반도체 공장 4기 중 절반만 돌릴 수 있는 전력이다. 향후 한전과의 추가 협상 과정에서 내부에 정통한 인물이 절실한 이유다. SK하이닉스는 현재 경기 남부 신안성 변전소에서 2.83GW를 조달하기로 한 상태며, 자체 LNG 발전소도 짓고 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정 사장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 증설과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요한 전력 확보는 한전·산업부·지자체·발전공기업이 모두 얽힌 영역이다. 공장을 짓는다고 곧바로 생산능력이 늘어나지 않는다. 전력과 용수, 송전망, 인허가가 함께 맞물려야 한다. 정 사장은 정부 부처와 공기업, 민간을 모두 거쳐 이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적임자로 꼽힌다.
SK 측도 정 사장을 “전력·에너지 전략 분야에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인물”로 소개하며 ”그룹이 추진 중인 전력·에너지 및 반도체 공장 구축 등 미래 성장 사업 경쟁력 강화에 핵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송전망 확충은 발전소 건설보다 더 어려운 과제로 꼽힌다. 용인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장거리 송전선로와 변전시설이 함께 구축돼야 하지만 주민 수용성 문제와 환경 규제 등으로 사업이 수년씩 지연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과거 SK E&S가 용인 클러스터에 LNG 열병합 발전소를 직접 건설하려 했으나 정부가 난색을 표명하며 계획이 막힌 전례도 있다. 민간이 발전소를 지으려 해도 정부 인허가와 전력 계통 편입이라는 관문을 넘어야 한다. 전기요금 부담과 재생에너지 조달 비용도 변수다. 직접 PPA나 자가발전, LNG 열병합 등 선택지는 있지만 정부 인허가 수용성 장벽이 높다.
전문가들은 결국 전력 문제의 본질이 발전량 부족이 아니라 송전망과 입지, 주민 수용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장거리 송전선에 의지해 외부에서 대규모로 전력을 조달하는 경우 전압 안정도가 떨어져 대규모 정전의 위험성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전영환 홍익대 교수는 “발전량이 많은 곳으로 부하를 옮기는 것이 좋다는 상식적인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 역시 전력 확보를 AI 시대 핵심 과제로 꼽아왔다. 최 회장은 지난 2월 20~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최종현학술원 주최로 열린 TPD 2026 행사에서 “데이터센터 하나에 원자력 발전소 하나를 매치해야 할 정도"라며 AI 인프라 확대에 따른 전력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최 회장은 ”필연적으로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SK는 AI 데이터센터와 발전소를 함께 짓는 새로운 솔루션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경주 APEC CEO 서밋 부대행사에서도 AI 데이터센터 확산이 반도체와 관련 서비스 공급망 병목을 만들고 있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전력과 인프라 확보가 AI 경쟁력의 전제가 됐다는 판단을 드러낸 셈이다.
결국 이번 인사는 단순한 전문가 영입을 넘어선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AI와 반도체 경쟁의 승부처가 기술 개발에서 에너지와 인프라 확보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정부·한전·지자체·지역사회와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인물을 전면에 배치한 것이다.
다만 정 사장의 합류만으로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되기는 어렵다. 전력 인프라는 기업이 독자적으로 구축할 수 없는 영역이고, 송전망 확충과 주민 수용성 확보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정승일 사장의 영입은 기술적 우위를 넘어 에너지와 공급망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경영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관리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SK가 ‘전기 확보’를 그룹 생존 전략의 핵심으로 못 박은 가운데, 정부·한전·지역 주민·환경 규제가 뒤엉킨 이 난제를 정 사장이 어떻게 풀어낼지 이목이 쏠린다.
이혜민 기자 hyem@kukinews.com














































